십삼행 유적은 어떻게 발견되었습니까? 왜 “십삼행”이라는 이름이 붙여졌습니까?
1955년 공군 소령 판커용(潘克勇)선생은 대만 빠리 관음산 상공을 비행하던 중 나침반에 이상반응을 발견하였습니다. 이에 따라 1957년 대만 대학교 지질학과 린차오치(林朝棨) 교수 등을 초빙하여 현지 조사를 실시한 결과, 깨어진 옹기 조각 및 사금파리 등이 대량으로 발견되었고 1800년 전부터 500년 전까지 이곳에서 선사시대 인류가 생활하고 있었음을 증명하였습니다.
박물관 입구에 놓인 포크레인은 1989년부터 시작된 십삼행 유적을 보호하는 작업을 떠올리게 합니다. 그 당시 정부는 이곳 6 헥타르가 넘는 땅에 폐수 처리 공장을 세울 예정이었습니다. 현재 약 7천 평방 미터의 땅은 보호 유지가 되고 있지만 아직도 3천 평방 미터에 달하는 땅은 개발 유보 구역으로 폐수 처리 공장에 속해 있는 상태입니다.
십삼행 명칭의 유래에는 세 가지 설이 있습니다. 첫 번째 설은 청나라 초기에 13개의 가게가 있었고 당시 십삼행장이라고 불렀다고 합니다.
두 번째 설은 대만말로 로한카(羅漢腳)라고 부르는 이야기인데 13명의 한족 총각들이 이곳으로 이민을 왔고. 바로 그 13명을 대만어로 발음하면 십삼행과 비슷하다고 합니다.
세 번째 설은 대만 원주민이 이곳을 십삼행이라고 불러왔다는 것입니다. 고고학의 관례에 따르면 가장 작은 단위의 지명으로 유적지 이름을 지정하는데 이에 따라 십삼행으로 지정되었습니다.